피에르 비요트(Pierre Billotte)

비요트의 움직이는 성

 

대개 1940년에 기습적으로 시행된 독일군의 '프랑스 전격전'이라 하면 폭풍같이 돌격하는 독일군의 전차부대와 급강하하는 슈투카 앞에 거대하지만, 구세대적이었던 프랑스군이 가랑잎처럼 풍비박산이 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허를 찔리긴 했어도 프랑스군은 분연히 자신의 위치에서 싸웠으며 맡은 바 임무를 다했고, 때로는 침입자들에게 믿기지 않는 피해를 안겨주기도 했다.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 피에르 비요트 대위였다.


훈장 이름의 유래

타고난 군인

피에르 비요트는 1906년, 군인이었던 앙리 가스통 비요트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연스럽게 군인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그는 제1차 대전에서 여단장과 참모 장교로 활약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기도 결심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확장돼 가던 1940년, 아들인 피에르가 대위일 무렵 아버지 앙리 비요트 역시 정년을 앞뒀음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벨기에 국경의 프랑스 제1 집단군사령관으로 착임 한다.

 

서방 전격전 개시!

1940년 5월 10일, 드디어 독일군은 당시 세계 최고의 육군 국가라는 프랑스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독-불 국경의 마지노 방어선(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 사이에 건설한 요새 방어선. 완성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총 750Km에 달한다. 입안자인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땀.)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벨기에 국경선으로 기동하자 이것이 국경 돌파의 주공이라 믿고 연합군이 사전에 조율한 대로 앙리 비요트의 제1 집단군에 의한 벨기에 월경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벨기에 방어 병력을 북쪽으로 돌리게 하려는 독일군의 속임수였고, 주로 전차로 구성된 독일군의 실제 돌파 주공은 전차 기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방치된 아르덴느의 삼림지대를 강행 돌파해 프랑스 내부로 들이닥친다.

거대한 마지노선의 요새들은 순식간에 그 의미를 잃고 앞뒤로부터 공격받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었고, 독일군은 돌파구를 확장하며 물밀 듯이 프랑스 내륙으로 돌진해 왔다.

대전 초기의 비요트. 캐나다로 가는 선상에서의 모습이다. 

 

혼전이 이어지다

독일군은 뮤즈강(Meuse)에 위치한 세당(Sedan)을 손에 넣고자 달려들었다. 여기를 점령하면 뮤즈강을 건너 프랑스 평야 지대를 통해 프랑스 내륙으로 어디든 달려갈 수 있게 된다.

5월 12일, 큰 저항 없이 세당을 함락시킨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의 독일 전차부대가 다리를 건너는데 시간을 허비했건만 프랑스군은 이를 포착해 제때 반격하는 데 실패한다.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영불 연합 공군이 다리를 폭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독일 공군의 효과적인 요격에 막혀 상당 수의 폭격기만 잃고 말았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세당에서 약간 떨어진 블송(Bulson)에서 본격적인 전차전을 벌이게 되는데, 독일군은 중장갑인 프랑스군 전차들이 손쉽게 격파하기 어려운 표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게 된다.

그들의 주력 대전차 포인 37mm Pak 36이나 이 포를 장착한 Pz.Kpfw.Ⅲ(게임내 독일 4단계 중형전차. 대전 초기 주로 대전차 전투 임무를 맡았다.)전차로는 Hotchkiss H35(프랑스 2단계 경전차)나 Char B1 bis(프랑스 4단계 중전차)같은 프랑스 전차를 쏴봤자 장갑의 페인트나 긁어내는 정도였던 것이다. 결국 독일 육군 정예부대인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이 가진 88mm 대공포의 수평 사격과 Pz.Kpfw.Ⅲ, Pz.Kpfw.Ⅳ 전차로 프랑스군 전차대의 양면 공격을 간신히 저지해낸 독일군은 프랑스 전차들이 좋은 지휘관만 만나면 무서운 전투기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운명의 스똔느

블송 전투 후 구데리안은 행군이 느린 보병부대를 기다리느니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영불 해협으로의 진격을 결정해 버린다.

5월 14일, 세당 교두보의 중요성을 잘 아는 프랑스군 역시 제3 기갑사단 및 제3 차량화 사단을 스똔느로 급파,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게 된다. 한시라도 빨리 해협으로 진격하려는 독일의 구데리안은 제10 전차사단과 그로스 도이칠란트 연대를 보내 스똔느를 통과하려 했지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스똔느 외곽의 몽듀(Mont-Dieu: 신의 산)를 발판으로 반격을 개시하려는 프랑스군과의 일전은 명약관화. 그리고 거기엔 Char B1 bis를 장비한 제41 전차 중대장인 피에르 비요트 대위의 모습도 있었다.

5월 15일, 드디어 전투는 개시되었다.
짧은 포격 후 독일군의 전차들은 프랑스군의 47mm 대전차포가 지키고 있는 스똔느를 향해 돌진했으나 프랑스군 대전차포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공격을 개시한 11대의 독일 전차 중 간신히 3대의 Pz.Kpfw.Ⅲ 전차만이 스똔느에 도착하는 게 가능했다. 보병들과 함께 독일군 전차들은 스똔느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 작은 마을은 이날만 해도 7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격전의 초점이 된다.

다음날인 16일 이른 아침. 독일군이 밤새 점령하고 있는 스똔느의 가도를 이동하고 있는 커다란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군의 Char B1 bis 중전차로 얼룩덜룩하게 칠해진 차체에는 Eure라는 별명이 쓰여 있다. 바로 피에르 비요트 대위가 탑승한 전차였다. 언제 어디서 매복한 전차나 대전차포의 사격이 날아올지 모르는 시가전은 전차에겐 피하고 싶은 전투다. 그러나 마을에 포진한 독일 전차들을 몰아내는 것 역시 전차의 할 일이었기에 비요트는 새벽에 프랑스군의 야포 포격이 끝나자 휘하의 전차들과 함께 마을로 진입한 것이다. 비요트의 전차가 홀로 마을을 가로지른 가도를 달려 교회에 다다를 때쯤 그의 시야에 뭔가가 확 들어왔다. 그것은 곧 있을 반격을 위해 일렬종대로 대기하던 독일군 전차 13대였다. 적 전차와는 불과 50m도 안 되는 거리. 그것이 적 전차라고 알아채자마자 비요트는 숨쉴 틈도 없이 차체 포수에게 75mm 주포 발사를 명령했다. 대열 선두의 독일군 Pz.Kpfw.Ⅳ 전차가 75mm 주포에 직격당해 폭발하는 순간, 비요트 역시 47mm SA35 전차포에 포탄을 밀어 넣고 다음 적 전차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조준 후 발사, 즉시 폐쇄기를 열어 탄피 배출, 그리고는 재장전 후 다시 조준... 비요트는 포연이 차오는 회전 포탑 안에서 고군분투하며 독일군 전차를 향해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차장이자 중대장인 비요트가 어째서 전차포의 장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프랑스군은 전차를 철저히 보병을 지원하는 무기로 보았고, 전차가 전투할 땐 이동 요새처럼 정지해서 하는 것이라 규정했다.그렇기에 전차에 많은 승무원은 필요 없다고 판단, 1인용 회전 포탑을 장착했기 때문에 전차장은 포탑 안에서 홀로 전차의 지휘 및 포수, 장전수의 역할까지 다 해야 했다. 게다가 Char B1 bis 전차는 주임무가 적 전차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체에 달린 75mm ABS SA35 야포의 직사로 적의 토치카나 야포, 집결한 적 보병을 일소해 보병의 돌파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으며, 회전 포탑은 자위용 및 지휘용에 불과했다.

폐허가 된 스똔느의 거리. 이 거리를 따라가며 비요트가 전설적인 전투를 벌였다.

갑자기 나타난 적 전차에 당황했던 독일군 전차들도 주포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으나 비요트는 침착하게 47mm 포로 대열 끝의 독일 전차를 격파, 이들이 도망갈 길을 끊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독일 전차포들이 비요트의 Char B1 bis 전차를 때리는 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그러나 최고 60mm의 Char B1 bis의 장갑은 독일제 전차 포탄을 콩알 튕기듯이 튕기며 천천히 가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비요트는 쉴 새 없이 47mm 전차포의 폐쇄기를 여닫으며 포탄을 급속 장전해 다음 독일 전차를 겨눠 발사했고, 전차가 멈춰 설 때마다 차체의 75mm 주포 역시 독일 전차들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늘어선 진회색의 독일 전차 장갑판은 47mm, 75mm 전차포의 근거리 직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펑펑 관통되며 차례차례 차체에서 불길을 내뿜었다.그러는 와중에도 독일 전차 포탄은 계속 비요트가 탄 전차의 장갑판을 때려대고 있었지만, 장갑판을 관통하지 못하는 그것들은 Door Knocker(관통하지 못하고 장갑판을 두드리기만 한다는 의미로 문 노커에 비유)에 불과했다.

거대한 차체를 움직이며 불굴의 진격을 하는 비요트를 쏴대는 것은 이들 독일 전차뿐만이 아니었다. 독일 전차들 뒤에선 독일군 대전차포들이 비요트의 B1 bis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계속 철갑탄을 날려대고 있었다.이 대전차포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비요트는 47mm, 75mm 포를 사격해 이중 2문의 대전차포를 바로 격파, 귀찮은 방해꾼들을 잠재웠다. 남은 독일군 전차들은 앞에서는 비요트의 B1 bis가 덜커덕거리며 접근해오고, 뒤는 부서진 아군의 전차가 가로막아 퇴로가 막힌 가운데(유일한 기동 공간인 남은 가도 부분은 비요트의 전차가 차지하고 내려오고 있었다) 악착같이 포를 쏴서 그를 막아보려 했지만, 허무하게 포탄이 B1 bis에 맞아 튕기는 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드디어 마지막 독일 전차가 격파되고 프랑스 전차 1대에 아군 전차대가 전멸하는 참극을 본 독일군 병사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접근해오는 비요트의 전차를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마을을 버리고 철수해 버렸다. 비요트의 대활약으로 인해 5월 16일 오전 07:30분 경 마을은 다시 프랑스군에 의해 탈환되었고, 비요트의 B1 bis 전차에 얼마나 기가 질렸는지 전날에는 7번이나 마을의 주인이 바뀌는 공방전이 벌어진 스똔느에 독일군이 반격을 걸어온 것은 이날 늦은 오후 딱 한 번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후 비요트의 B1 bis 전차에 남은 140개가 넘는 도탄 흔적은 그 날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증언해 주었다.

비요트와 그의 전차 EURE. 바로 이 전차가 140여발의 적탄을 튕겨내며 신화를 만들었다.

흔히 프랑스 전차라고 하면 전격전 때 독일군 전차에 성능적으로 밀렸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독일군은 갑자기 나타난 프랑스군 전차를 자신들의 전차나 대전차포로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어서 88mm 대공포의 수평 사격이나 Ju-87B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공습 등으로 저지했다는 기록이 많다. 비록 프랑스군 전차들이 무전기도 없고 평균적인 속도도 뒤지는 편이었으나 전차 대 전차로만 붙는다면 대전 초기의 독일 전차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위력이 있음을 비요트는 몸소 입증했다.

이런 람보 같은 비요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똔느는 국지적인 수적 열세에 밀린 프랑스군의 철수로 독일군 손에 들어갔고, 곧이어 남부를 제외한 프랑스 국토의 반 정도가 독일군에게 점령되며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스똔느 전투 후 비요트는 다른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독일군에 생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지만 이 뼛속까지 감투 정신으로 가득 찬 그를 그리 오래 가둬둘 순 없었다. 곧 수용소를 탈출한 비요트는 소련으로 향했고, 거기서 자유 프랑스군 소련 대표부에 근무하다가 경력을 인정받아 런던에 있는 샤를르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 사령부 참모로 부임하게 된다.

본격적인 유럽 해방을 위한 D-Day 침공작전이 시작되자 그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기갑 여단장이 되며, 그의 부대는 원조받은 미국제 M4 Sherman(미국 5단계 중형전차)전차를 몰고 가장 먼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해방한 자유 프랑스군 부대가 된다. 그 후 장군으로 진급한 비요트는 전후 동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UN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1950년에 전역하게 된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부하, 그리고 자국산 전차를 믿고 훌륭히 싸운 역전 용사의 일대기다.

전후 이스라엘을 방문한 비요트가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의 비요트 훈장

[비요트 훈장]

역시나 140발이 넘는 포탄을 맞아가며 10대가 넘는 적 전차를 격파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비요트의 전과에 걸맞게 비요트 훈장의 조건은 만만치 않다.

1. 다섯 군데 이상 장비의 손상 및 최소 80% 이상의 내구도 피해
2. 살아남아야 하며 전투는 이겨야 한다.
3. 최소 1대 이상의 적 전차 격파

 

어떻게 하면 획득할 수 있을까?

불은 껐지만 탄약고가 나가서 장전은 느리고 엔진도 불타서 속도가 반감되어 그르릉대는 전차. 이런 다 부서진 전차 당장 포기하고 다음 판을 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140발을 맞아가며 전투를 이기고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가며 파리를 되찾은 비요트의 불굴의 정신을 생각한다면,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 포탄으로 전투를 이긴다는 믿음을 가진 플레이어에게 비로소 비요트 훈장이라는 명예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전에 소개한 타르차이 훈장의 조건에 비하면 전차 격파 댓 수가 약간 적을 뿐, 그 외의 조건은 같은 것이 이 훈장의 특징이다. 저런 악조건의 상황이 되자면 아군 대열의 거의 최선두에서 전투 하며 여러 대로부터 사격을 당하던가 자주포에 한 두발 맞은 상황을 의미한다. 특히 최소 5개 이상의 장비 손상이라는 설정은 상대방한테 그냥 두드려 맞은 게 아니라 화재가 나서 한번 소화한 상황인 경우가 많다. 왜냐면 그냥 포격만 당한다면 장비 5개가 고장 나기 전에 대개 전차가 터져 버리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

그러면 새로운 전장에서 여러분과 한 판 붙을 순간을 기다리겠다.

 

플래툰(Platoon) 이준규 기자

※ 위의 내용은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글로,
워게이밍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순수 군사/역사에 대한 글입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