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차와 맞선 기병대의 신화

전차와 맞선 기병대의 신화

언젠가 한 번 본 이후로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이 그림 한 점입니다.  

마치 중세 시대 그림을 찢고 뛰쳐나온 듯한 기병들이 칼을 뽑아 들고 돌진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금속제의 전차가 위압감을 뽐내며 상대하고 있습니다.
적을 막 베려는 듯한 기병과 전차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두 주제가 한 폭에 담겨있는 매우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전차와 기병, 그리고 기관포와 칼, 마치 만화 삽화와 같은 황당한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림 하단에 적혀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하단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적혀있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 전차에 맞서 정면 돌격하는 폴란드 기병]

전차가 일반화된 시대에 ‘감히 칼을 들고 맞서려 했다고?’라는 생각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실제로 존재한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는 부연 설명을 읽고, 못 미더운 마음에 전쟁사를 뒤적거렸던 기억이 선합니다.

이 그림 속 초현실적인 비대칭 전투의 주인공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 기계화 기동 사단과 그들에 맞선 폴란드의 포모르스카(Pomorska) 기병 여단입니다.

폴란드의 포모르스카(Pomorska) 기병 여단

 

이 전투에서 폴란드 기병 여단을 볼링핀처럼 쓰러뜨린 독일군 제19군단 제20 기동 사단의 지휘관이었던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 (Heinz Guderian)은 후일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The Polish Pomorska Calvalry Brigade, in ignorance of the nature of our tanks, had charged them with swords and lances and had suffered tremendous losses.’
(폴란드 포모르스카 기병 여단은 우리가 가진 전차의 위력도 모른 채 무작정 칼과 창만 들고 돌격해 왔다. 그리고 무수한 사상자를 남겼다.)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 (Heinz Guderian)

그의 기록은 전쟁 후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폴란드 기병대가 진정한 군인 정신을 보여줬다는 찬사도 있었지만, 전차를 상대로 돌격한 건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평가가 공존했습니다. 혹자는 포모르스카 기병 여단의 돌격이 독일 전차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가짜라는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고도 했으며, 또 다른 혹자는 전멸의 위기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기 위해 돌격을 감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미국에 거주하는 폴란드계 미국인 협회(Polish American Cultural Institute Of Minnesota)에서 작성한 기록이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쟁사를 정리한 제드 대령의 기록(Captain Zedd's Military History)을 보면 그 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폴란드를 침공하는 독일군 기동 사단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 독일군 제20 기동 사단은 폴란드 포모르스카 기병 여단 제18 기병 연대와 기습적으로 조우하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기병대의 등장에 당황한 독일 보병 부대가 폴란드 기병대에 유린당하던 것도 잠시, 곧 들이닥친 독일군 중화기 차량들에 의해 폴란드 기병대는 포위됩니다. 
기병대 250명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좌충우돌했고 그 과정에서 폴란드 지휘관 마스텔라즈 (Mastelarz) 대령을 포함한 기마병 20명 사망하고 60여 명이 부상을 입고 독일군의 포로로 잡힙니다.

이 사건이 역사적 논쟁으로 비화된 건 그다음입니다.  

기동 사단을 지휘 중인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

전투가 종료된 후, 독일군 종군 기자들이 취재차 현장을 찾았습니다. 널브러진 말 사체와 기마병 복장의 폴란드군, 그리고 구데리안 장군의 설명을 들으며 기자들은 폴란드 기병대의 무식한 전차 돌격 이야기를 지어낸 것입니다. 250명의 기병대가 전차를 향해 돌격했다면 20명 사망이 아닌 230명 사망, 20명 탈출로 기록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여러 전쟁 참가국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것입니다. 일부 국가에선 적 전차와 맞서 싸운 용감한 병사들의 전설로 미화되고 어느 국가에선 무식함의 극치로 이용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기병대의 전차 돌격은 사실처럼 굳어진 것이죠.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이동 중인 폴란드 기병대

사실, 폴란드 기병대의 전투 방식은 기관총을 상대로 칼이나 창을 휘두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스웨덴제 37mm 대전차 중화기와 폴란드제 Maroszek WZ 35 대전차 화기를 말에 싣고 다니며 적의 전차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시 기병대는 대전차 무기로 무장한 보병의 이동을 위해 말을 이용하는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영웅적인 폴란드 기병대의 신화도, 전차를 향한 기병대의 터무니 없는 돌격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독일군 하인즈 구데리안 장군의 할리우드 액션과 사실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마구잡이 기사를 써내려간 기자들만 있었을 뿐입니다. 


파괴된 도심을 가로지르는 폴란드 기병대

일본군의 반자이(일본어로 ‘만세’, ‘무모한’이라는 뜻을 갖는다.) 돌격처럼 전투에서 전력의 차이를 무시한 무모한 돌격은 전투력 낭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폴란드군 지휘관도, 독일군 지휘관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아군의 전력이 적군보다 열등한 경우 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공격은 기습이나 매복, 게릴라 전술이나 측면 공격입니다. 정면돌파가 아닌 적군이 방심한 틈에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로 임해야 승리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사실을 폴란드 기병대가 모르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입니다.  

필자가 본 그림은 실제로 벌어진 전투를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잘못 전해진 포모르스카 기병대의 이야기가 군인 정신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글: 가우디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가우디의 역사 이야기 #1 신교도들의 전차, 보헤미안 워 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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