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의 탄생 전에 장갑 차량이 있었으니, 제 1차 세계 대전은 이들이 활약하기엔 가혹한 무대였습니다. 승리를 차지하기 위한 연합국의 고군분투 현장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바퀴 달린 장갑차는 궤도가 달린 전투 차량의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장갑차가 활약하기엔 당시 주어진 환경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기나긴 비포장도로를 끊임없이 달려야 했으며 참호전이 펼쳐지는 전장에서 진흙, 포탄 구멍 등 많은 장애물을 통화해야 했습니다. 단지 바퀴만 장착했으니 궤도 차량이 보여줄 수 있는 우수한 지형 통과 능력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5년 2월부터 육상선박위원회(Landships Committee)의 개발자들은 영국군의 "놀라운 무기"가 될 자주포 장갑차 개발을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 누구도 실현 가능한 개발 계획에 돌입하지 못하게 되자 영국 해군은 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무기 개발을 포기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몇 년 전에 탄생한 또 다른 "움직이는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바퀴 달린 장갑차였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될 전차(Tank)의 사촌뻘 되는 셈이지요. 여타 새로운 발명품의 탄생처럼 장갑차를 처음 본 군 장교들은 이것을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진기한 물건쯤으로 단순히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국가의 군대가 장갑차를 실제 전투에 채용하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걸렸습니다. 최초의 장갑차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와 동부 전선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됩니다.
서부 전선 첫 번째 장갑 차량 사단 탄생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벨기에는 전쟁의 악몽을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됩니다. 벨기에의 Charles Henkart 중위는 개인 미네르바 자동차를 운용하여 최전방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 재치 있는 방안을 고안합니다. 차량 보호를 위해 장갑판을 덧대고 8mm 호치키스(Hotchkiss) 기관총을 장착한 것입니다.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이름을 붙인 이 장갑 차량은 모든 장비를 갖추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능 또한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에서 최대 90km의 빠른 속도로 독일군 진지를 향해 빠른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장갑차량은 매복하고 있던 독일군에 의해 발견되어 격파되고 맙니다. Henkart 중위는 전사하였으며 그의 혁신적인 시도는 전장에서의 성공적인 장갑 차량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군 장교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하였습니다.
파리에 주둔 중이던 벨기에 군 Auguste Colonne 소령의 경우 더욱 성공적인 장갑 차량 활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1914년 후반에 필요 장비를 갖춘 장갑 차량 사단을 창설하고 미네르바와 푸조에 37mm 주포와 기관총이 장착된 장갑 차량을 운용하였습니다. 사령관, 포수, 조종수, 부조종수로 구성된 4인 승무원이 각 장갑 차량에 배치되었습니다. 일부 장갑차의 무게는 무려 4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장갑 차량 "미네르바"와 승무원들>
벨기에 장갑차 사단에서는 차량 수리 서비스가 독립적으로 가능했으며 자전거 사단 또한 존재했습니다. Colonne 소령은 자신의 사단원들을 엘리트 병사로 대우하여 파리의 고급 남성복점에서 별도의 유니폼을 주문 제작하였습니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 군인을 선호하였지만 물론 예외는 있었습니다. Constant le Marin으로 알려진 가장 용맹한 군인은 "그들의 머리를 베어버릴 것이다!"라는 유명한 전투 표어를 만들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다른 한 사람은 당시 18세였던 벨기에 시인 마르셀 티리(Marcel Thiry)로 "흥미롭고 역사적인 전투에 기여"하기 위해 사단에 입대하였습니다.
Colonne의 사단은 1915년 봄까지 불로뉴에서의 시험 운행을 거쳐 플렁드흐에 배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포탄 구멍과 유독 가스 구름으로 뒤덮인 황폐화된 땅이었습니다. 벨기에 장갑차 사단은 전투에 참여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1차 대전의 참호전에서 장갑차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영국의 장갑 차량 사단 탄생
영국의 장갑 차량 사단의 역사는 영국 왕립 해상 비행대(Royal Naval Air Service)에서 시작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영국군은 항공기를 사용하여 정찰 활동을 펼쳤지만 상당수가 격추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당시에도 조종사의 존재 가치는 매우 높았기에 추락한 조종사 구조는 최우선 과제가 되었고 이 임무는 영국 왕립 해상 비행대의 요청으로 개발된 Lanchester 장갑차 승무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Lanchester 장갑차는 8mm 두께의 장갑판을 둘러 차체를 보호하였으며 7.62mm 맥심 또는 7.7mm 루이스 기관총을 장착하였습니다.
장갑 차량 사단의 사령관 Oliver Locker-Lampson은 당시 영국 의회 하원의 보수당 대표로서 고위 정치가였습니다. 벨기에의 Auguste Colonne 소령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롤스 로이스 자동차를 장갑차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일반 육군 운전수는 하루에 6실링의 임금을 받았지만 그는 운전수에게 10실링을 지불했습니다. 이는 군 운전수 임금 문제를 두고 육군성 장관 호레이쇼 키치너(Horatio Kitchener)와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왕립 해상 비행대의 장갑 차량 사단은 플렁드흐로 보내졌지만 벨기에 장갑 차량 사단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유용성을 입증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역사가 Jaroslav Galubinov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장갑 차량 사단은 플렁드흐에서 벌어진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그들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였다. 수많은 참호로 뒤덮인 전장에서 기동 차량은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서부 전선의 연합군은 더 이상 작전에 투입할 수 없는 두 개의 전투 준비 사단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에 제1 기관총 소대가 결성된 러시아 제국에 이들 장갑 차량 사단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러시아 제국 장갑차 부대의 활약
당시 러시아 제국은 자동차 기관총 부대의 개념을 선구적으로 고안했습니다. 1906년 Knyazh M. A. Nakashidze에 의해 이러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하였지만 불행히도 그는 폭탄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의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습니다.
1914년 8월, 육군성 장관 V.A. Suchomlinov는 "장갑 차량 기관총 소대"의 창설을 승인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이 소대는 Cornell A.N. Debrzhansky의 지휘 아래 북서부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들은 루소 발트(Russo-Balt) 경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제작된 장갑차로 무장하였습니다. 차량에는 5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였고 각 세 자루의 맥심 기관총이 장착되었습니다. 이들은 곧 추가 차량을 구입함과 더불어 영국으로부터 오스틴 장갑차를 조달 받게 됩니다.
<나뭇 가지로 위장한 러시아 제국의 루소 발트 장갑차 >
하지만 곧 기관총만 장착한 장갑차의 화력은 전투를 치르기에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더 큰 구경의 총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이어 미국에서 생산된 5톤 "Garford" 모터 트럭을 차체로 채용하여 대구경 총과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는 장갑차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부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장갑차는 러시아 제국군에 의해 더 많이 운용되었고 매우 효과적인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1914년 11월 10일, 폴란드 Stryków 마을에서 루소 발트 장갑차로 무장한 러시아 제국군의 공격을 목격한 이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탄 세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형체를 보았다. 삐걱거리는 기계 소리를 내며 그들은 줄을 지어 앞으로 나가갔다. 그리고 또 다른 줄이 앞으로 나아갔다... 으스스 한 기운을 내뿜는 회색의 형체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독일군을 뚫고 차가운 총탄 소나기를 퍼부었다. 곧 러시아군의 우레와 같은 '만세!' 외침은 온 마을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2년 후, 전장의 군인들은 위와 같은 충격적인 광경을 또 한 번 목격하게 되니 바로 전차(Tank)의 등장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각 장갑차 부대에는 고유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예를 들어 Austin 자동차를 기반으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 부대는 "Adsky", Garford 차량을 기반으로 대구경 총으로 무장한 장갑차 부대에는 "Grozny"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들은 전장에서 보병 횡단로를 확보하였습니다.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는 아군 공격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에 제한적으로 운용되었으며 대구경 총을 장착한 장갑차가 전투에서 우선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서부 전선보다 진지전 전술이 많이 활용되지 않았던 러시아 전선에서는 그때까지 총 120대의 장갑차가 성공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엔진을 탑재한 장갑차는 물리적인 기동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이들은 도로 위 또는 최소한 한 개의 궤도를 탑재한 상태에서만 기동할 수 있었습니다. 겨울과 봄에는 악천후로 인해 악화된 상태의 도로를 통과해야 했으며 때때로 바퀴에 스노우 체인을 장착해야 했습니다.
열악한 도로 상태는 작은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갑 차량을 전투 지역으로 운반하기 위해 말이 필요했습니다. 전장까지 장갑차를 견인하면 불필요한 기동력을 소모하지 않아 수명이 길어졌고 무엇보다 엔진이 작동하는 소리로 인해 적에게 발각될 위험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갑 차량은 진흙 구덩이에 자주 빠졌으며 이들의 무거운 중량은 약한 골조의 다리를 건널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몇몇 사령관은 장갑 차량을 전투에 활용하기 꺼려 했습니다.
사령관 Locker-Lampson이 지휘하는 장갑차 부대는 코카서스와 루마니아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으며 1917년 6월에는 그리스에서 벌어진 러시아 제국군의 마지막 공세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 장교는 당시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적들은 가스, 화염방사기 등을 동원한 치열한 반격을 가했습니다. 우리는 위치를 사수할 수 있었지만 전진할 수는 없었습니다." 1918년, 결국 부대원들은 쿠르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들판에 장갑 차량을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제1 차 세계 대전은 장갑차의 운용 시험장이 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기동성을 갖춘 차량을 사용하여 전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동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1915년 여름부터는 전쟁의 전반적인 양상이 참호전으로 변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장갑 차량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참호전의 수렁에 빠져있던 당시 영국의 종군기자였던 Cornell Ernest Dunlop Swinton은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야전 사령관 John French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냅니다."가솔린 트랙터를 기반으로 궤도가 달린 새로운 전투 차량 개발이 필요합니다."
이 한 통의 편지가 전쟁 역사의 흐름을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자: Yuri Bahurin(영문)
출처
Boyen R. The division of Belgian armored cars in the Imperial Russian Army // The last war of the Russian Empire: Russian Empire, the world before, during and after the World War I according to documental sources from Russian and foreign archives. M., 2006. P. 226–232.
Golubinov Y. British soldiers of Air, Naval and Armored Divisions in Russian Empire // Warspot. 17.07.2016. http://warspot.ru/6596-britanskie-aviatsionnye-bronemoryaki-v-rossii.
Kirilets S. V., Kaninsky G. G. Combat vehicles in the Imperial Russian Army. «Combat vehicles academy» of General Sekretev. М., 2010.
Kolomiets M. V. Armored combat vehicle division in the Imperial Russian Army // Russian Empire in the World War I in 1914–1918: Encyclopedia. В 3 v. T. I. М., 2014. P. 212–221.
Popova S. S. Trials of Belgian soldiers in the Russian Empire // War-historical journal. 1996. № 2. P. 4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