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특집] 현대 전차의 아버지

'육상 전투 무기의 왕'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전차는 과연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하였을까요?

절대 쉽지만은 않았던 전차의 탄생은 한 사람의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조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어버이날 특집으로 준비된 현대 전차를 탄생시킨 전차의 아버지 '어니스트 스윈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현대 전차의 초기 형태가 탄생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영국, 육군 위원회의 기술자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전투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전투용 차량을 만들어 내고자 하였습니다. 육군 수뇌부는 이 새로운 제안을 무시했지만 결국 1915년 8월 초에 '동력구동식, 방탄 기능, 무한궤도 바퀴' 3가지 원칙에 맞게 구현된 전차의 첫 번째 초기 형태가 탄생하게 됩니다. 

당시 매우 소모적이었던 참호전의 돌파구가 될 현대적 개념의 '전차'를 처음 고안하고 이를 추진한 사람은 영국의 종군기자인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 (Ernest Dunlop Swinton)이었습니다.

끔찍했던 참호전의 목격자

스윈튼 중령은 소설에 나올 법한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군사 요원, 보어 전쟁 참전, 뛰어난 군사 기술자, 기자, 분석가 등 전쟁 관련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며 많은 것을 봐왔지만 1914년 가을 한 전장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셸쇼크 (shell shock)'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다"고 훗날 회고한 그 전장에서 기관총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수십만의 병사들을 목격합니다. 그는 이 의미 없는 참호전을 끝낼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셸쇼크: 전투 스트레스 반응(CSR; combat stress response).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부 군인들에게 나타난 전쟁신경증. 융단폭격, 전투 등 격렬한 상황에서 느낀 극단적 공포와 충격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각이나 잠자기, 걷기, 말하기 등이 불가능해진 상태를 일컫는 용어. 출처: 위키피디아 

어니스트 던롭 스윈튼 (Ernest Dunlop Swinton)

끊임없는 설득의 과정

1914년 9월 19일 스윈튼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가 옛 동료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비롯하였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앤트워프(Antwerp)에서 진행된 미국 홀트(Holt) 트랙터 테스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홀트(Holt) 트랙터가 다른 모든 차량을 제치고 지형 돌파 기능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을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스윈튼은 영국군 수뇌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높은 주행력을 자랑하는 이 농기계에 필요한 장비를 제대로 장착한다면 전투 목적의 무기로 변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농업용 기계를 무기로 바꾸는 아이디어를 그는 은유적인 표현 방식으로 "파종 (sowing)"이라고 불렸습니다.

스윈튼의 혁명적인 아이디어는 사실 본질적으로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쟁기를 칼로 전환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화로운 농촌의 상징인 농기계를 전투 무기로 탈바꿈시킨 것이었습니다.

스윈턴이 트랙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지 일주일 후, 그는 런던을 방문하던 차에 당시 영국 국무 장관 호라시오 키치너(Horatio Kitchener)와 그의 아이디어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그의 오랜 친구이자 제국방어위원장(secretary of the Committee of Imperial Defense)인 모리스 행키(Maurice Hankey)와 '무장 기관총 차량' 아이디어에 대해 처음으로 의논하게 됩니다. 모리스 행키는 그의 아이디어를 맘에 들어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군사 기술자이자 당대 영국 최고의 폭파 전문가인인 톰 톨로크(Tom Tulloch) 또한 이 아이디어에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윈튼은 그의 계획에 관한 아무런 사전 언급 없이 영국 총리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스윈튼 자신이 군인으로서 군사령부의 위계질서를 위반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상관인 키치너 경(Lord Kitchener)과 의논되지 않은 안건을 제안할 수 없다고 끝내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전쟁 역사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무기의 개발은 착수조차 되지 못하는듯 하였습니다. 

'키치너 경은 당신을 원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 장려를 위해 제작된 포스터. 당시 영국 국무장관 호라시오 키치너(Horatio Kitchener)가 모델로 등장하였다. 

1914년 10월 22일 스윈튼은 영국군 본부가 소재한 프랑스의 생 오메르 (Saint-Omer)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엔지니어 부서의 지휘관과 방호 및 건설 작업의 책임자를 만나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책임 지휘관이 기술적인 세부 사항을 의논하고 조사하기에는 너무 바빴기 때문에 곧 보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무기 개발을 위해 여러 군사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과정은 점차 맨땅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처럼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지원

1915년 1월 2일, 스윈튼에게 또 하나의 절망적인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모리스 행키(Maurice Hankey)는 키치너 경 (Lord Kitchener)에게 '전투 차량'에 관한 아이디어를 설명했지만, 불행히도 키치너 경은 이 아이디어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리스 행키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 영국 총리인 허버트 에스퀴스(Herbert Asquith)와 영국 최초의 해군 장관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게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이 문서를 받은 처칠은 '육상 전함'이라는 아이디어에 주목하고 곧 개발 위원회를 창설했습니다. 1915년 1월 2대의 홀트 트랙터가 테스트 되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스윈튼은 초대되지 않았습니다.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Holt 트랙터

스윈튼은 훗날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불명확한 이유로 육군성과 협력하에 진행하는 무기 개발에 반대하였다. 이것은 코미디에 가까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육상 전함 개발위원회를 발족시킨 사람이 결국 이 모든 연구와 노력을 귀중한 시간과 자원 낭비로 만든 것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보였습니다.

결국 스윈튼은 전차 개발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사람으로서 프랑스에 주둔한 영국군 사령관  존 프렌치 (John French)에게 전차 개발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 담긴 성명서를 보내게 됩니다. 이 성명서에서 스윈튼은 '휘발유로 작동되는 무한궤도 트랙터와 유사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성능이 구현되어야 하는데 속도는 7km/h, 최대폭 1.2m의 참호 횡단 가능, 2개의 기관총 장착, 40mm 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존 프렌치는 이 성명서를 읽고 한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당 요구 사항에 맞게 개조할 수 있는 차량을 과연 영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예 새로운 종류의 차량으로 개발할 수 있을까?" 존 프렌치는 개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스윈튼을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스윈튼의 '파종' 아이디어가 마침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찾아온 행운의 여신

행운의 여신은 용기 있고 인내하는 자에게 언제나 미소를 보냅니다. 스윈튼은 모리스 행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전차 개발을 계속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계획했던 모든 일을 실행할 열쇠를 얻었다"고 그는 당시의 일을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계획에 필요한 사항을 군 당국에 요청하였습니다. 일주일 만에 링컨셔 (Lincolnshire)에 위치한 윌리엄 포스터 (William Foster & Co. Ltd.)라는 회사가 프로토 타입의제작을 맡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혼스비 (Hornsby) 트랙터와 대포 견인을 위한 대형 바퀴가 달린 트랙터를 제작한 경험이 있었기에 선정될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문제는 개발 팀을 이끌 적절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사의 이사인 윌리엄 트린턴(William Trinton)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기관총 구축 차량 (machine gun destroyer)'의 프로토타입 개발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전에도 참호를 가로지를 차량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1915년 초 그의 아이디어로 제작된 '움직이는 바퀴 달린 다리 (moving wheeled bridge)'의 테스트는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때문에 이 새로운 프로젝트는 그에게 있어 실패의 국면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1915년 참호를 가로지를 목적으로 트리튼이 개발한 차량

영국 왕립 해군 중위 월터 고든 윌슨(Walter Gordon Wilson)도 곧 이 프로젝트에 합류합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초부터 왕립 해군 전투 차량 부서(Royal Naval Armored Car Division)에서 차량을 관리해오며 자동차 관련 산업에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었습니다. 

프로토타입의 제작은 엄격한 기밀 유지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오직 허락하에 자리를 비울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들은 즉시 해고되었습니다.

프로토타입 시연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개발 관련자들의 긴장과 불안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육상 전함 개발 위원회의 책임자는 스윈튼 프로젝트가 성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시연 취소까지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시연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개발에 참여한 공장 노동자들은 가족과 함께 참석하는 기대감에 들뜬 모습을 보였습니다.

1915년 9월 22일, 마침내 '제1호 링컨(Lincoln Machine No. 1)' 프로토타입이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이게 됩니다.

프로토타입 '제1호 링컨(Lincoln Machine No. 1)'의 시연 모습

곧 자랑스럽게 쓰인 전보가 해군 본부에 도착합니다. "어제 진행된 시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철판에서 새롭게 창조한 이것은 가볍지만 매우 단단합니다."

이로부터 3개월 후, '전차(Tank)'라고 불릴 차량이 드디어 탄생하게 됩니다.

 

참고문헌

Fedoseev S. L. Tanki Pervoy mirovoy. M., 2012.

Glanfield J. The Devil’s Chariots. Osprey, 2013.

Swinton D. E. Eyewitness. Being Personal Reminiscences of Certain Phases of the Great War, Including the Genesis of the Tank. New York,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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