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의 역사 이야기 #3 노르망디 상륙 리허설

전차장 여러분,

전장에 흐르는 긴장감만큼 전쟁 중에는 흥미진진한 사건이 자주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가우디가 여러분께 생생한 역사 이야기를 전해줄 것입니다.
잘 알려진 사건부터 와전된 일화까지, 앞으로 가우디가 소개할 역사 이야기에 대해 많은 기대 바랍니다.

가우디가 소개할 세 번째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리허설입니다.

실패해서 성공한 작전? - 노르망디 상륙 리허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범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작전명으로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넵튠 작전(operation Neptune) 혹은 디데이(D-day)라고 달리 불리기도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극적 반전을 이끌어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사진 1. 노르망디에 상륙 중인 연합군 병력

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여러 작전이 한데 묶인 ‘패키지 상품’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유럽침공을 앞두고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영국에 집결시킨 라운드업 작전(Operation Round-up), 독일군 수뇌부를 속이기 위해 기획된 기만전술인 바디가드 작전(Operation Bodyguard) 외에도 여러 작전이 함께 기획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디가드 작전만 해도 열 개의 기만전술이 합쳐진 작전으로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포티튜드 작전(Operation Fortitude)입니다.

네, 맞습니다. 독일군 주력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해 가짜 상륙부대를 만들어낸 바로 그 작전입니다.

그 안에는 다시 25만의 유령부대를 스코틀랜드에 만들어 노르웨이로 독일군을 유인한 포티튜드 작전:North와 영국 남부에 25만의 가짜 부대를 만들어 프랑스 칼레에 독일군 기갑부대를 묶어둔 포티튜드 작전:South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노르망디 상륙작전 패키지를 설명하는 이유는 이 모든 작전이 노르망디 작전의 성공을 위해 기획 되었다는 점과 여기에서 소개할 작전 역시 그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사진 2. 노르망디에 상륙 중인 병사들

노르망디에 상륙할 연합군 1진에는 총 156,115명의 병력이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중 57,500명의 보병과 15,500명의 공수부대를 투입한 미군은 작전 개시를 앞두고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1진의 병력 47%를 떠맡고 있는 입장에서 적군의 화력시범이라도 구경해본 영국군, 프랑스군과 비교하면 미군은 말 그대로 전투를 글로 배운 병사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새화된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저지선을 뚫고 전진하려면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고 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병사들은 쏟아지는 포탄과 기관총 세례 앞에서 우왕좌왕할 게 뻔했습니다. 심지어 총질이나 제대로 할지 의문이었고 이는 장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군 수뇌부는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 실전 훈련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전 무대로 향하기 위한 상륙 리허설을 기획한 것입니다. 최대한 실전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어 훈련을 진행하면 병사들이 진정한 수컷으로 거듭나리라 믿었습니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이란 말처럼 겁먹은 병아리들을 용맹한 사자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여러 번의 상륙 리허설을 준비했습니다. 
작전 자체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훈련이 지나치게 실전에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리허설 장소로 영국 남부의 작은 도시 데본(Devon)을 선택했습니다. 
이 지역의 해변이 미군이 상륙할 노르망디의 유타 해변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사진 3. 노르망디 유타 해변

사진 4. 데본 해변

1944년 1월, 미군은 첫 번째 상륙 훈련인 덕 훈련(Exercise Duck)을 시행합니다. 병사들을 상륙정(LST)에 태우고 영국에서 노르망디까지 걸리는 것과 같은 시간 동안 항해했습니다. 이는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려는 군 수뇌부의 깨알 같은 배려였습니다. 드디어 미군의 상륙정들이 해변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의욕에 찬 미군들은 폭풍이 몰아치듯 해변을 향해 달려나갔습니다. 
사고는 이때 발생했습니다. 예상보다 수심은 훨씬 깊었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백 명이 바다에 뛰어든 다음이었습니다. 간조와 만조 같은 물때를 잘못 계산하여 수심이 깊은 곳에서 상륙정의 문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병사들은 허우적거리다 무거운 군장과 함께 가라앉았고 첫 훈련에서 익사한 병사만 무려 400명에 달했습니다.


사진 5. 해변을 향해 진격 중인 병사들

1944년 3월 9일, 미군 지휘부는 첫 번째 훈련 실패를 만회하고자 두 번째 훈련인 팍스 훈련(exercise Fox)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번엔 좀 더 현장감을 살려보고자 함포사격도 추가했습니다. 병사들이 상륙하기 직전까지 해변에 포격을 퍼붓고 포연을 맡으면서 해변을 달리다 보면 병사들이 느끼는 현실감이 높아질 것이란 판단에서였습니다. 이는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군과 영국군 지휘부 간의 소통에서 발생했습니다. 시간 약속을 잘못한 탓에 미군이 상륙을 개시한 이후에도 두 나라 군함들의 함포사격이 멈추지 않은 것입니다. 아군의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는 상황은 급히 함포사격을 중단시킬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어느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이날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진 아군의 포탄 숫자가 실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 번째 훈련에서도 수백 명의 병사가 사망했습니다. 두 번째 훈련의 정확한 희생자 수는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극비처리 된 이 날 사건에 관한 공식자료를 내놓지 않았으나 참전 전우회 자료에 의하면 첫 번째 훈련 때보다 적지 않은 숫자가 희생당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진 6.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함포사격을 쏟아붓는 연합군 함대

단 두 번의 실전 같은 훈련으로 무려 팔백 명의 미군이 적군은 구경도 못 해보고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닙니다. 최악의 사고는 다음 훈련에서 벌어졌습니다.

1944년 4월 중순, 세 번째 훈련인 타이거 훈련(Exercise Tiger)이 펼쳐졌습니다. 총 25,000명의 미군이 참여했고 앞선 작전들에서 벌어진 실수들에서 배운 대비책은 충분히 마련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발생했습니다. 
데본의 해안가에 도착한 미군 상륙정(LST)들이 훈련개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상륙정마다 그득그득했던 미군 병사들이나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장교들은 야식을 먹으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상륙정의 숫자가 이상하게도 출발 때보다 늘어나 있었던 것이죠. 

영국 군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한 미군의 상륙정은 총 8척이었습니다. 그러나 LST 515, 496, 511, 531, 58, 499, 289, 507호가 순서대로 항진하는 틈에 낯선 배 두 척이 야음을 틈타 슬그머니 대열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명 E-boat로 불리던 독일 어뢰 함이었습니다. 조용히 함대 내로 끼어든 독일군은 영국 구축함이 철수를 위해 뱃머리를 돌린 새벽 1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사진 7. 독일군 E-boat

먼저 LST 507이 어뢰로 폭발했습니다. 곧이어 LST 531도 두 발의 어뢰를 얻어맞고 화염에 휩싸이자 미군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LST 289마저 어뢰를 맞고 불길에 사로잡히자 미군들은 서로의 LST를 향해 마구잡이로 사격을 해댔습니다. 혼란을 틈타 독일군 어뢰정은 빠져나갔고 LST 507, 531 두 척은 병사들을 태운 채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8척 중, 단 LST 289만이 간신히 해안가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8. 어뢰를 맞고 간신히 도피한 상륙정 289호

겁에 질린 군인들은 구명조끼를 급히 걸치고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저체온증과 구명조끼 사용 미숙으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밝자 모래사장에는 총상 및 화상으로, 그리고 익사로 인해 죽은 군인들의 시체들이 빼곡히 밀려 나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기밀을 접한 고위급 정보장교 10명의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만약 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통째로 갈아엎어야 했기 때문에 연합군 수뇌부는 바짝 긴장했습니다. 연합군 지휘부는 전력을 다해 수색작전을 벌였고 불행 중 다행으로 10명의 장교 시신 모두를 찾아내고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LST 세 척에 직격탄을 입힌 것에 만족하고 미군이 노르망디와 비슷한 풍광의 데본을 훈련장소로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하늘이 도운 셈입니다.

타이거 훈련에서만 사망한 미군 숫자는 참전 전우회 집계 639명, 언론기관 집계 946명입니다. 단일 훈련 중 사망한 군인 숫자로는 실로 어마어마한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 9. 타이거 훈련 추모비

타이거 훈련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 돼버린 이유는 명백합니다. 호위를 맡은 영국 군함들이 해안선까지 접근해서 정찰하던 독일군 어뢰 함 편대에 대한 경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원인으로는 자국 해안에서 시행되던 훈련인지라 호위함대의 규모도 턱없이 작았고, 무엇보다 영국 해군이 호위를 위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군기가 해이해진 영국 해군 덕에 미군은 떼죽음을 당한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덕, 팍스, 타이거 훈련 세 번으로 미군은 최소 1,100명에서 최대 1,8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상륙작전을 앞두고 엄청난 인명손실을 당해버렸죠. 그러나 그 대가로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상륙지점과 정확한 물때 계산의 중요성,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 네 나라 부대 간 공조와 통일된 연락체계의 필요성, 마지막으로 상륙부대를 지켜줄 호위함대의 증강 등을 몸소 교훈으로 얻은 것입니다. 연합군은 피로 얼룩진 훈련들을 통해 배운 교훈들을 접목해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노르망디가 아닌 영국의 해변에서 죽어갔다는 사실만큼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야심이 있던 군 수뇌부들에게 LST를 격침한 어뢰만큼이나 치명적인 상처를 낼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상륙훈련에 참여한 모든 군인은 군사기밀유지서약을 해야했고 때문에 이 훈련의 비극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진 10. 타이거 훈련 중 침몰한 미군 셔먼 전차

현재 데본(Devon)에는 미군 Sherman 전차 한 대가 모래 언덕에 서 있습니다. 참전 군인들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전우들의 희생을 기려 바다에 가라앉은 전차를 인양해 세워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값진 희생이었는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만큼 무의미한 희생이었는지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리허설은 실패한 훈련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훈련치고는 너무 많은 희생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훈련들은 성공적이었다고도 평가합니다.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타이거 훈련 참전 전우회도 유보한 역사적 평가는 이 사건을 접하는 개인들의 시각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글: 가우디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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