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의 역사 이야기 #6 잊혀진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2편)

전차장 여러분, 

전장에 흐르는 긴장감만큼 전쟁 중에는 흥미진진한 사건이 자주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가우디가 여러분께 생생한 역사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잘 알려진 사건부터 와전된 일화까지, 가우디가 소개하는 역사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가우디가 소개할 여섯 번째 이야기는 고(故) 김영옥 대령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잊혀진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2편)


2차 세계 대전 중 유럽 전선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고 제대한 김영옥은 미국에서 세탁소 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사업을 정리하고 미군에 재입대해 한국 전쟁에 참전합니다.

미 7사단 31연대에 소령으로 배정된 김영옥은 연대 정보참모 겸 작전참모로 초기 전투를 지휘하게 됩니다. 이후 김영옥은 31연대 제1대대의 지휘를 맡게 되는데, 당시 이 대대는 계속된 후퇴 및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사진 1. 1951년 겨울 부대대장과 악수 중인 31연대 1대대장 김영옥 소령

일례로 150명의 부대원이 100m도 떨어지지 않는 지점을 지나가는 무방비 상태의 적군을 향해 기습공격을 퍼붓고도 단 한 명도 맞추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파악한 김영옥은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하려는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비교적 수월한 전투에 각 중대를 돌아가며 선봉에 세워 병사들의 승리감과 자신감을 점차 되찾게 하여 전투력까지 점차 향상되어 나갔습니다. 초기 병사들의 사기를 상승시키는 데 집중했던 김영옥은 부대 전력이 높아지자 본격적으로 대규모 전투에 돌입합니다.

그중 김영옥이 이끄는 대대는 수안산에 주둔한 중공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대 주둔지와 수안산 사이는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멀리 우회해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옥 소령은 소음이 발생하는 차량과 탱크는 우회하게 하고 전 부대원은 적진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야간행군을 지시하게 됩니다. 전 부대원을 일렬종대로 세워 적진을 향해 30km를 야간 행군으로 관통한 1대대는 수안산 맞은편 445고지에서 전투를 준비합니다.

이 전투에서 김영옥 소령만의 창의적인 전술은 다시 한번 발휘됩니다. 당시 미군 편제는 1개 보병대대가 작전 시 1개 포병 중대가 지원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김영옥은 이 전투를 위해 군단 포병대, 군사령부 포병대의 지원을 추가로 요청해서 총 126문의 포 지원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사단, 군단의 대공포 부대로부터 대공화기인 40mm 구경 대공포 보퍼와 0.5인치 구경 기관포 4개를 차량에 탑재해서 쏘는 대공포 쿼드 50을 각각 2문씩을 더 지원받았습니다.

사진 2. 한국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대공포 보퍼

거대한 지원 요청으로 평소 화력의 7배로 증강한 126문의 포는 적진지를 맹 포격해서 적군을 참호 깊숙이 묶어 둘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아군 선발대와 적 전지 간 거리가 50m 이내로 좁혀지면 아군의 피해를 막기 위해 포 사격을 중지했습니다. 그리고 정확도가 높은 대공 화기의 발사각을 조절해서 다시금 피아간 거리가 10m 내로 좁혀질 때까지 적 진지에 집중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런 공격이 가해진 후 중공군이 정신을 차리고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쯤에는 아군 병력이 10m 이내 거리까지 근접한 상태였습니다. 이 전술은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군의 사기를 꺾는데 주요한 효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진 3. 한국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대공포 쿼드

보병 전투에서 특이하게 대 공포를 투입한 것, 군단, 군 사령부 포병대의 전투 지원 요청 등은 김영옥만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많은 화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지휘관은 한계를 두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믿은 결과였습니다. 그 믿음의 바탕은 병사들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김영옥의 탁월한 전술에 힘입어 승리한 수안산 전투는 1대대의 구만산 전투, 탑골 전투, 금병산 전투에 이어 또 하나의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중부 전선을 북으로 60km나 밀어 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휴전선이 중부 전선에서 북으로 튀어나오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영옥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맹활약하며 지금의 휴전선인 중부전선을 지켰습니다. 휴전 이후 중령으로 진급한 김영옥은 미국으로 귀환하여 포트 베닝 보병학교의 첫 아시아계 장교로 근무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김영옥은 대령으로 미군에서 예편한 이후에도 한국과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한국 전쟁 후 미국 군사고문으로 한국을 다시 방문한 김영옥은 한국군 전시 동원 계획을 개편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미사일 부대 창설을 제안하여 1964년 111 방공 포병 대대 창설에 군사 고문으로써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999년, 캘리포니아 주 의원이었던 마이클 혼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 및 배상 촉구 결의를 제안했을 때, 실질적인 후원자로 법원 통과에 힘썼습니다. AP통신에 의해 세상에 밝혀진 미군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의 고위급 진상 조사단 일원으로 조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4. 미국 LA의 김영옥 중학교

미국 LA에는 고 김영옥 대령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김영옥 중학교’가 있습니다. 위키피디아는 김영옥 중학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 설립된 Young Oak Kim Academy는 전쟁에서 미군 부대를 지휘한 최초의 아시아인 지휘관으로 활약한 김영옥을 기념하여 이름 붙여졌다. LA에서는 최초이자 미국 전체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의 이름이 붙여진 세 번째 학교이다.”

김영옥은 미군 역사상 최초로 실제 전투에서 대대를 지휘한 유색인 지휘관입니다. 유럽 전선과 한국 전쟁에서 활약하고 네 나라에서 무공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김영옥 대령은 리더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리더십의 본질은 비전과 의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누구나 실천하기 어려운 명제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영옥 대령은 삶 전체를 통해서 그 스스로 리더십이 무엇인지 증명해 보였고 그 가치를 입증해 보였습니다.

사진 5. 김영옥 평화센터를 방문한 필자(왼쪽)

이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조국에서는 잊혀진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을 지금부터라도 기억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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