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 죽음의 행군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한국군과 유엔군은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맹렬한 기세로 북진하던 한국군과 UN군을 막아서는 살 떨리는 첩보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인해전술의 원조,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 가능성이었습니다. 개전초기 병력충원의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 정부는 이 첩보에 놀라 한국의 모든 청년을 예비병력으로 편성키로 합니다. 중공군 개입 시 필요한 병력을 미리 확보해두려는 의도였죠.
이 목적에 따라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전국의 17세에서 40세 사이 병역미필자 238만 명 중 68만 명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고 경상도, 제주도 지역엔 이 병력을 수용하기 위해 49개 교육대 캠프가 세워졌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이 현실화되자 정부는 다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선은 미친 속도로 밀려 내려왔고 소집된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킬 교통수단은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촉박한데 날씨 또한 한겨울로 접어들며 모든 걸 강행하기에는 제약이 많았습니다. 설상가상 급조된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민간인 출신들로 작전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진 1. 국민방위군 행군 모습
이런 악조건에서도 남하를 지시받은 각지의 국민방위군은 수백 명 단위로 나뉘어 산길과 소로를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요 도로는 유엔군이 사용하여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겨울 장거리 행군에 나선 그들에게 식량은 부족했고 의약품 지급도 어려웠습니다. 정부의 소집 지시는 있었으나 그에 대한 지원은 없었습니다. 국민방위병들은 스스로 식량을 구해야 했고 강추위, 병마, 부상의 위험 속에서 능력껏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배고픔과 추위를 버티며 죽음의 행군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험난한 여정을 이겨낸 끝에 캠프에 도착한 국민방위군의 인원은 고작 3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절반이 넘는 38만 명이 행군 과정에서 사라진 셈입니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당시 국방부는 38만 명을 대부분 단순 낙오자, 도망자로 분류했고 사망자는 1,234명으로 집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 사건을 조사한 국회 내무위원장의 발표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무려 5만 명 이상의 응소자가 질병, 굶주림, 비인간적 대우로 죽었다. 국민방위군 중 수십만 명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음을 맞기 전에 이탈하였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도 약 25만 명은 노동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
충격적인 발표였습니다. 중공군의 합세로 전선이 밀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예비병력이 총 한번 못 만져보고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전방도 아닌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포화 속으로] [고지전] 류의 치열한 육탄전 스토리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겐 참 낯설기 짝이 없는 사건입니다. 믿기지 않는 이 실화는 단지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을 뿐, 실제 이 나라 이 땅에서 벌어진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사진 2.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성모(왼쪽)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오른쪽)
1951년 이 사건이 국회를 통해 국민방위군 예산을 무더기로 횡령, 착복한 고위간부들의 조직적 비리 때문에 빚어진 참사라 밝혀졌습니다. 국민방위군에 지급된 예산을 고위간부들이 착복해 식량과 의약품을 병사들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했고, 그 결과 엄청난 아사자와 병사자를 일으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발표에 당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국민방위군 참상을 운운하는 짓거리는 모두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 역시 국회에서 울분에 찬 열변을 토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제5열의 분열 책동이다."
제5열이란 적진 후방에 침투해서 교란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간첩 조직을 의미합니다. 즉, 당시 정부는 이런 주장을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닌 내부분열을 노리는 간첩들의 모략 질로 간주한 것입니다. 사망자 천 명 대 사망자 5만 명, 빨갱이들의 분열 책동 대 진실규명, 국민방위군에 대한 진실규명요구는 이적행위로 매도당했습니다. 조사에 나선 헌병대는 관련자들의 일부 책임을 인정해 다음과 같이 판결했습니다.
[사령관 김윤근 무죄, 부사령관 징역형, 국민방위군 혐의자들 전원 파면]
사건은 이렇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헌병대 조사결과는 더 큰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외신들은 이 사건을 본국에 송출하기 시작했고 국민은 들끓었습니다. 물론 양심적 정치권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궁지에 몰린 정부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수사지휘 라인에서 제외하고 헌병사령부에 재조사를 지시했습니다. 당시 국민방위군은 비 군인이라 유엔군 지휘가 아닌 이승만 대통령 > 신성모 국방부 장관 > 김윤근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지휘하에 있었습니다. 즉, 애초부터 신성모 국방부 장관 아래에서는 공정한 수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사진 3. 국민방위군의 모습
2차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조직적 횡령과 비리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1951년 1월부터 3월까지 석 달간 국방부가 국민방위군 사령부로 지급한 예산 중 교육대 운영경비로 지출된 44억 원을 조사해보니, 그중 32%에 해당하는 14억 원이 빼돌려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드러난 국민방위군 예산집행은 모든 부정과 비리의 종합예술 그 자체였던 것이죠. 예산 부풀리기, 선 공제, 허위기재, 문서위조, 부정처분, 근무 태만, 횡령, 배임, 공갈, 가혹 행위, 상납 등 모든 종류의 비리가 조직적으로 벌어졌고 이렇게 고위 간부들이 횡령한 금액은 총 24억 원, 식량 1,800가마로 집계되었습니다. 당시와 지금의 물가 차이를 고려해보면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이 중 1억 3천만 원은 국회의원 활동비로 유입된 정황증거까지 포착됐습니다. 조국을 지키라고 대한민국 청년들을 모아놓고 밥값을 빼돌려 자신들의 배만 불린 것입니다. 나라야 망하든 말던, 남이야 죽던 말든.. 그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국민방위병에게 지급된 하루 치 식량은 4홉이었습니다. 4홉은 소주 14잔 분량으로 끼니로 계산하면 4.6 잔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이 양은 당시 전쟁포로에게 지급되던 양보다 적을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행군 중 병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어도 약품은 없었습니다. 그저 땅바닥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행군 및 교육 중 얼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버려졌습니다. 집계 주체에 따라 사망자가 9만까지도 늘어나지만 행군 도중 사라진 38만 명의 행방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었으니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했습니다. 대략 5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게 현실적인 수치였습니다.
사진 4.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 처형 집행 장면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헌병사령부는 1951년 7월 19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부사령관, 재무실장, 조달 과장, 보급 과장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망신시킨 괘씸죄인지, 제5열의 추가모략을 막기 위한 것인지 몰라도 사형 집행은 빛의 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8월 13일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하지만 고위급에 대한 수사 의지 역시 형집행 속도만큼이나 빨리 수그러들었습니다. 정치자금을 받은 국회의원 수사는 중단되었고 관련 민간인 혐의자들은 모두 무죄 처리되었습니다. 직접 지휘 선상에 있었던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마무리되며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 전쟁 중 벌어진 가장 부끄러운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연출된 한국형 부정부패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죠. 규모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심히 부끄럽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피로 피를 씻으며 조국을 지켜낸 용맹한 한국전 전사(戰史)에 존재해서는 안 될 난감한 사건이었으니 교과서조차 이 사건을 제대로 싣지 못했습니다.
애초 징집 대상자를 50만 명으로 보고 생존에 필수적인 예산만 편성한 데다, 그마저도 위에서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이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참상을 보고받고도 대책을 취하자는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정치권은 수만 명이 죽어가는데도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현금에 눈이 멀어 사건을 외면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진상조사 요구는 색깔론을 동원해 극 세사 이불처럼 촘촘히 덮어버리려 했습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수물자를 배정받지도 못했고, 민간인도 아니라는 이유로 유엔 구호물자 역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가 징집해서 수용했으면서도 국가는 이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국민방위병들은 제대로 된 보상도, 기억도 되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잊혀 갔습니다.
사진 5.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에 공식 사과를 권고(출처: SBS뉴스)
6월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입니다. 매년 이맘때면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미디어에서 접하게 됩니다. 보통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맞아 조국의 강산을 지키다 장렬하게 산화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는 많은 영웅 못지않게 위기를 틈타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던 매국노들 역시 적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반역자들 때문에 억울하게 숨져간 무수한 생명이 있었고 그 반역자 중 상당수는 여전히 한국전쟁의 영웅이란 대접을 받으며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교훈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통해 죽음의 행군을 벌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국민방위군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회피한다면 식민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극우들과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위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로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잘못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글: 가우디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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