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의 역사 이야기 #10 맥심 기관총이 남긴 교훈

맥심 기관총이 남긴 교훈 - 옴두르만 전투

기관총은 여러 면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발명품입니다. 비단 전쟁의 역사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기관총의 등장과 더불어 수탈의 역사, 야만의 역사, 학살의 역사 그리고 식민 제국주의의 역사가 활짝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사진 1. 전쟁의 양상을 바꾼 맥심 기관총

총기는 화약과 총알을 총구 앞쪽에서 집어넣어 사용한 전장식 방식과 총 뒷부분의 탄을 삽탄하는 후장식 총기가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보병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미덕은 변함없이 백발백중에 돌격 앞으로였습니다. 전장식보다 후장식이 편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전투에서 승패를 가름 짓는 큰 차이로 작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당 6백 발이 넘는 총탄을 쏘아 붓는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전투의 양상은 바뀌었습니다. 돌격 앞으로 대신 방어선 너머 참호 속에 웅크리는 참호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무턱대고 적진으로 돌격하기에는 기관총의 살상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기관총은 수적 열세를 만회하고 적의 사기를 꺾는 무시무시한 발명품이었습니다. 이 땅의 동학교도들이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우금치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진격하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군과 관군의 혼성부대가 가지고 있던 몇 정의 기관총이 보여준 가히 압도적인 위력 때문이었습니다.

기관총의 여러 모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맥심 기관총입니다. 1881년 개발된 이후 여러 변형품과 업그레이드 모델을 파생시킨 맥심 기관총은 개발자 하이람 맥심(Hiram Maxim)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습니다. 맥심이라는 단어는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남성용 잡지 혹은 커피의 대명사로 더 유명할지 모르지만 ‘격언’, ‘금언’의 뜻을 가진 영어단어이기도 합니다. 격언, 금언이란? 삶에 본보기가 될 만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짤막한 어구라는 뜻입니다. 즉 맥심 기관총은 이름 자체로서 그리고 성능 그 자체로서 적들에게 ‘화력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기였습니다. 전쟁의 양상을 바꾼 세기의 발명품에 이런 이름이 붙은 건 우연이었을까요? 아님 필연이었을까요?


사진 2. 참호전의 시작, 기관총의 등장!

맥심 기관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드르륵' 나가는 완전 자동화된 방식에 1세대 개틀링 기관총보다 경량화되어 상대적으로 이동이 쉬웠습니다. 병사들은 열광했고 너도나도 이 총으로 무장했습니다. 전차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맥심은 군대에서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강력함으로 맥심은 "쓸어버린다"의 사전적 의미를 재정립했고 기관총은커녕 소총 복제조차 버겁던 식민지 국가들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갈 수 없는 심각한 전력 차이를 안겨줬습니다. 개틀링 기관총에 이어 사용자 편의성을 증대한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제국주의 나라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주에 널린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그들의 귀중한 격언(Maxim)을 총탄에 실어 마구 퍼부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군도 기관총이 안겨준 그 무자비한 격언을 몸소 느껴야 했던 장본인 중 하나였습니다. 기관총 때문에 녹두 꽃은 떨어졌고 청포 장수는 울어야 했습니다.

맥심의 등장으로 비로소 대량 살상의 역사는 활짝 열렸습니다. 좋든 싫든 한 발 한 발 표적을 겨냥해야 했던 당시 군인들에게 가늠자를 통해 보이는 적군은 최소한 사람이었고 인격체였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작은 신체의 움직임과 피를 튀기며 쓰러지는 적군 간에는 작게나마 죄책감의 상관관계가 존재했습니다. 자신이 대의를 위해 싸우지만,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인식만큼은 존재했던 셈입니다. 자신이 쏜 총탄을 맞고 무너져 내리는 또 다른 인격체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사진 3. 자신의 개발품을 시연하고 있는 하이람 맥심

위 사진에서 땅바닥 가득 탄피를 쏟아내며 기관총의 성능을 뽐내고 있는 맥심 할아버지는 전쟁의 양상만 바꾼 게 아닙니다. 병사들이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 했던 살인의 죄책감을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정확히 조준할 필요도, 그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도 더 확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적군을 향해 총구를 겨냥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됐습니다. 가늠쇠 너머로 몰려오는 적군은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게임 속 저그, 테란, 프로토스였을 뿐입니다.

맥심 할아버지가 이 기관총으로 안겨준 최고의 전과는 1898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있었던 옴두르만(Omdurman) 전투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윈스턴 처칠도 참전했던 이 전투에서 25,000명의 영국군과 이집트 혼성군 그리고 수단의 이슬람 전사 52,000명이 대격돌을 벌였습니다. 수단을 삼키려던 영국, 신앙의 힘으로 침략자를 물리치려던 수단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국군 47명 사망, 수단군 10,000명 사망. 당시 증언에 따르면 수단군 사망자의 75%가량이 맥심 기관총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하이람 맥심이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에디슨을 확실하게 누르고 군수 분야 최고의 발명가로 등극하는 순간이자 그의 발명품, 맥심 기관총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의 전투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4. 왼쪽 점으로 표현된 수단군과 강을 등지고 진을 친 영국군 배치도

1898년 9월 2일 수단 옴두르만, 영국의 허버트 키츠너(Herbert Kitchener) 장군이 이끄는 8,000명의 영국군과 17,000명의 이집트 혼성군은 나일강을 등지고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나일강에는 다섯 척의 포함(Gunboat)을 띄워 후방을 수비하게 하고 진지 바로 앞에는 가시덤불로 장애물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사이사이에 회심의 카드였던 맥심 기관총을 배치해 집중적인 화망이 구성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영국과 이집트군은 이곳에서 한방에 수단의 주력을 꺾을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 맞서 수단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뭉친 수단의 다르비시 병사들은 기병 3,000명을 포함해 모두 52,000에 달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을 지니고 있던 그들의 전의는 하늘을 찔렀지만, 창, 칼 그리고 간혹 전장식 소총 등으로 무장한 그들의 화력은 전의만큼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지도자 칼리파는 전 병력을 다섯 부대로 나눠 주력은 언덕 뒤에 매복시킨 채 전면에는 8,000명의 선발대만 노출했습니다. 화력은 열세였지만 수적으로 우세하고 전의가 높은 최정예 전사들로 구성된 부대였기에 칼리파는 야간이 아닌 동틀 무렵인 아침 6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했습니다. 정면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사진 5. 옴두르만 전투에서의 영국군 모습

수단군의 집결을 감지한 영국군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맥심 기관총은 고결한 유럽의 기독교 군대에 맞선 이교도들에게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완벽한 상태로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수단군은 동이 트자 마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창과 소총으로 무장한 수단군 8,000명이 영국군 진지를 향해 맹렬히 돌격을 시작했고, 금세 그 수는 16,0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영국군이 소총을 일제히 쏘아댄다고 하더라도 수적 우세를 이용하면 충분히 울타리를 타고 넘어 영국군 진지를 짓밟을 수 있는 병력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당시 회고를 빌리자면 몰려오는 다르비시 전사들을 보는 영국군들은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고 합니다.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알고 있던 그들에겐 바야흐로 즐거운 학살이 벌어지려던 순간이었겠죠. 다르비시 부대가 영국군 진지에 가까워지자 맥심 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앞서 달리던 수단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습니다. 그들의 시신을 뛰어넘어 달리던 병사들도 맥심이 불을 뿜을 때마다 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시체는 계속 쌓였지만, 다르비시 전사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불과 30분에 걸친 첫 교전에서 수단군 4,000명이 사망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였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돌격했지만, 맥심 기관총의 두려운 위력 앞에서 누구도 영국군 진지 50m 이내로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후퇴를 몰랐던 다르비시 전사들은 기관총과 포격의 화망 사이에 갇혀 숨져갔습니다. 사망자의 상당수가 기도하는 자세로 머리맡에 신발을 정리한 채 숨져있었다는 현장 기록은 그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쳤던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진 6. 옴두르만 전투 묘사도

첫 공격을 철저하게 분쇄한 키츠너 장군은 전 군에 진격명령을 내렸습니다. 400명의 기병대를 필두로 강력한 화기를 앞세운 영국군은 다르비시 주력 3만 병력과 격돌했고 파상 공세를 계속했던 수단군은 완벽하게 괴멸당했습니다.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전투였던 셈입니다. 이 전투로 수단군은 모두 10,000명이 사망하고 13,000명이 부상, 5,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영국군 사망자는 겨우 47명에 불과했고 382명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영국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수단의 칼리파는 살아남은 잔여 병력과 함께 후퇴하며 후일을 도모했지만, 그 다음 전투에서도 속절없이 패배했고 결국 자신도 전투도중 사망했습니다. 옴두르만 전투의 결과 영국은 수단을 집어 삼켰고 그 가치를 입증한 맥심 기관총은 유럽 열강들에게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사진 7. 옴두르만 전투 당시의 원스턴 처칠

2차 대전의 영웅이기도 했던 처칠은 자신이 쓴 책 [강의 전쟁/수단 정복]에서 옴두르만 전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옴두르만의 전투는 끝났다. 야만인을 상대로 한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불과 다섯 시간 만에 가장 강력한 무장을 갖췄던 야만인 이교도들을 위대한 유럽 군대의 힘으로 쓸어버렸다.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피해는 미미했다"

수단은 그렇게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1956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마 조선을 침탈한 제국주의 세력이 일본이 아닌 영국이었고, 윈스턴 처칠이 옴두르만이 아닌 우금치에 있었다면 저 말속에 등장하는 야만인 이교도들은 한국인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피 식민지 사람들은 야만인이었고 이교도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학살을 해도 죄책감이 없었고 자신들의 지배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옴두르만 전투는 끔찍한 학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최대 공신은 맥심 기관총이었습니다. 맥심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호하는 식민지 공격의 첨병이 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개량을 거듭했습니다.



사진 8. 2차 세계대전에서 한 층 개량된 맥심 기관총

맥심 기관총의 전신인 개틀링 기관총이 사실은 전쟁을 빨리 끝내서 그 희생자를 줄여보자는 의도로 개발된 것이지만, 정작 그 이후 기관총 때문에 대량 학살의 역사, 침략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결국 역사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더 잔인하게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가우디의 역사 이야기는 연재되지 않습니다. 1편부터 10편까지 연재를 진행한 가우디가 작별인사를 남깁니다. 

가우디의 역사이야기를 마치며.......

영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History repeats itself"

역사는 반복된다는 뜻이죠.  

사드 문제로 사면초가에 빠진 지금의 한국에서 마치 명청 교체기의 광해군과 조선을 보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현재에서 역사 속 한 장면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과거는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흔적만은 아닙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내일을 사는 지혜를 찾을 수 있는 보고일수도 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늘어나기를 기원하면서 가우디의 역사 이야기는 이번 화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글: 가우디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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