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개발의 역사 #3 전격전이 가져다준 승리

강력한 주포와 엔진으로 무장한 전차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핵심 무기입니다. 이번 주 전차 개발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로 돌아가 전차를 이용한 작전이 어떻게 역사적인 전투의 승패를 갈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전격전이 가져다준 승리

1938년 독일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병했습니다. 체코 슬로바키아와의 합병으로 인해 독일은 커다란 정치적 이점을 누릴 수 있었는데 바로 군사력의 증대였습니다. 당시 체코 슬로바키아의 Skoda 공장은 독일 PZ. III와 거의 동일한 35t, 38t 전차를 제조하여 느린 전차 생산 속도로 골머리를 앓던 독일로서는 환영할 만한 해결책을 제공하였습니다. 

<체코 슬로바키아의 Skoda 38t 전차>   

    

<체코 슬로바키아의 Skoda 35t 전차>   

<독일 Munster 전차 박물관에 전시된 Skoda 38t>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Pz III 초기 버전>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는데 이것은 '전격전'이라고 불리는 전술이 실제로 처음 실행된 시기였습니다. 폴란드는 즉시 약 1 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그들이 가진 공군과 전차는 독일의 군사력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폴란드 군대는 곧 한 달 만에 전쟁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독일은 폴란드를 상대로 한 예측지 못한 빠른 승리에 축배를 들었지만,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은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소위 '최고의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영국군도 프랑스에 주둔하여 프랑스 군사력에 힘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프랑스 군대는 277 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750km에 달하는 강력한 '마지노선'을 구축했습니다. 프랑스군은 S-35 중형전차와 B1 중전차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두 전차 모두 독일이 보유한 전차만큼 좋은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마지노선(Maginot Line):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가 1927년부터 독일의 전차부대를 막기 위해 지어진 750km의 요새선. 하지만 1940년 독일군의 벨기에를 통한 우회 공격으로 돌파된다. 이 요새선 구축을 건의한 당시 프랑스 국방성 장관 '앙드레 마지노(Maginot)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명칭. 오늘날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로 현대인들에게도 익숙한 단어이다.

           <프랑스의 B1 중전차>                       

전세의 흐름을 바꾼 '만슈타인 작전' 

제2차 대전을 위한 독일의 계획은 1차 대전 때의 계획과 거의 같았습니다. 독일의 주요 부대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서부터 전선을 넓혀가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도 독일의 이러한 계획을 예상하여 이에 따른 작전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명장 만슈타인(Manstein) 지휘관이 당시로써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계획하여 독일 군 당국에 제출합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예상대로 군사력을 배치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이목을 그 지역으로 집중시킨 다음 프랑스군의 방어망이 상대적으로 약한 룩셈부르크 인근 아르덴에 독일 기갑 부대를 투입해 프랑스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 프랑스군의 허를 찌른 후 독일 군대는 곧바로 영국 해협으로 진출하여 북쪽에 있는 영국군의 주력 부대를 포위하는 것이 전체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만슈타인 작전'이라고 불렸습니다.

<독일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지휘관>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독일 군대는 1940년 5월 10일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구데리안(Guderian) 장군이 지휘하는 기갑부대는 세단(Sedan)에서부터 침입하여 영국군의 허를 찔렀고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5월 20일 영국 해협에 도착하였습니다. 독일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북부에 주둔한 영국 - 프랑스 군대와 남쪽 프랑스 군대와의 연합전선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세는 영국과 프랑스에 불리하게 돌아가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33만 명의 영국군 병력이 덩케르크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덩게르크 철수 시 영국군은 수많은 병사를 먼저 구하기 위해 700대 이상의 멀쩡한 전차를 버려야 했습니다. 

6월 14일 파리는 독일 군대에 점령되었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3일 뒤인 6월 17일에 독일을 상대로 휴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전차를 핵심 전술 요소로 사용한 '전격전'은 큰 성공을 거두어 당시 '최고의 군사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았던 프랑스를 전쟁 개시 약 한 달 만에 굴복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차는 육상 전쟁 무기의 왕이 되었고 기갑 부대는 전장에서 결정적인 승리 요소로 간주 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치열한 전투

이 시기의 독일 전차는 영국과 프랑스 전차보다 특별히 나은 성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독일 전차들은 전술과 전차 간의 의사소통에 의존하였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의 발발 이후 모든 교전국의 전차 성능이 강화되었는데 예를 들어, 독일 Pz. III는 50mm 주포로 대체하였고 장갑 또한 두꺼워졌습니다. Pz. VI 또한 더 나은 관통력을 가진 75mm 주포를 재장착하였습니다.

독일 군대는 발칸반도를 공격하고 영국군과 그리스군을 무찔렀습니다. 이렇게 독일이 유럽을 장악했을 무렵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북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진 이탈리아가 당시 영국이 통치하고 있던 이집트를 공격하여 처참하게 패한 것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고 싶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당시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계획 중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을 분산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충직한 동맹인 이탈리아 지도자 무솔리니의 요청을 무시할 순 없었습니다. 결국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전투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온 롬멜(Rommel) 장군과 휘하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 파견하게 됩니다. 

<독일의 롬멜(Rommel) 장군>

<Sd.Kfz. 250 장갑차에 탑승한 롬멜 장군

롬멜은 1942년 2월 북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영국군을 향한 반격에 나섰습니다. 영국군 전차들은 독일군 전차보다 수는 많았지만, 이동성이 좋지 않고 주포의 성능이 다소 떨어졌습니다. 영국군의 융통성 없는 전술 또한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습니다. 롬멜은 프랑스 전투에서 쌓은 경험을 한층 활용하여 1500m 이상의 거리에서 영국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88mm 대공포를 사용했습니다. 이 전술은 전차 수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독일군의 약점을 효과적으로 극복했고 롬멜 장군은 '사막의 여우'라는 명성을 얻으며 전장에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실제 아프리카 전장에서 사용된 88mm 구경 주포>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롬멜 장군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 (German Africa Corps)'은 6월에 토브룩(Tobruk)을 점령하고 이집트로 향했지만 엘 알라메인(El Alamein) 전투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서 대량 생산된 M3와 M4 전차를 보유하기 시작한 영국군은 전차의 수와 성능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습니다.

M4 Sherman 전차는 2차 세계 대전 기간 미군의 주요 중형전차였습니다. M4 Sherman의 성능은 평균이었지만 생산과 유지가 쉬웠으며 최고 속도가 48km/h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연료 효율이 높지 않았고 공격당했을 때 불이 날 확률이 높았습니다. 당시의 미국은 거의 제한 없는 대량 생산 산업 능력을 보유한 세계 최초의 국가였는데 이것은 전차와 기타 장비들을 끊임없이 동맹국에 전달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미국은 1942~1943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무려 53,000대 이상의 M4 Sherman 전차를 제조했습니다.      

<좌: 미국 M3 Lee 전차, 우: 독일 Munster 전차 박물관에 전시된 M-4 Sherman>

전차 보급에 힘을 얻은 영국군은 다시 독일을 상대로 항전하였습니다. 그리고 1942년 말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은 결국 1943년 5월에 아프리카 전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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