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주포와 엔진으로 무장한 전차는 전장에서 장엄한 위용을 과시하며 전쟁 무기의 왕으로 불립니다. 이번 주는 세계 1, 2차 대전 시기의 독일로 돌아가 전차 개발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전격전의 아버지 - Guderian 장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100,000명 이상의 군사를 가질 수 없었으며 전차와 전투기에 대한 개발 및 연구가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1935년 독일 정부가 군대 재조직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전에도 독일의 전차와 전투기는 비밀리에 연구 개발되었는데 Pz. I은 'Landwirtschaftlicher Schlepper'라는 이름으로 개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독일의 Guderian 장군은 기갑 부대의 창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전차가 주력 부대의 역할을 하고 공군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 기동력을 최상으로 높이면 적이 점령한 전장을 돌파하는 것이 더 쉬우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전격전 (Blitzkrieg)'이라 불리는 이 작전은 일부 보수적인 군 지휘관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끝내 세계 최초의 기갑 부대가 성공적으로 조직되었습니다. (1934년 영국군은 실험 목적으로 기갑 여단을 조직했으나 정작 군 핵심 참모들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 참고: 독일은 'Blitzkrieg'라는 용어를 고안하지 않았습니다. 이 용어는 미국 Time지에 의해 고안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Heinz Guderian 장군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독일 전차 개발사
이 시기에 독일의 전차 개발 수준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때 개발된 Pz. I은 다소 얇은 장갑에 단 두 개의 7.92mm 구경 기관총을 장착하였고 승무원 또한 전차장과 운전수 총 2명만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성능이 다소 떨어지는 이 전차는 훈련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6대의 Pz. I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는데 아쉽게도 난징 전투 중에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좌: Pz. I 전차들 우: 독일 Munster 전차 박물관에 전시된 Pz I>
이후 개발된 Pz. II는 Pz. I 보다 큰 차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mm 주포, 7.92mm 기관총으로 무장됐고 3명의 승무원 (전차장 / 포수, 장전수, 운전수)이 탑승할 수 있는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전차는 주로 정찰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Pz. III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활약한 주력 전차였습니다. 장갑은 두꺼운 편이 아니었지만, 37mm 포를 장착했으며 최고 속도가 40km/h에 달하였습니다. 승무원 구성은 더욱 발전해서 전차장, 포수, 장전수, 운전수, 무전수까지 총 5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였습니다. 당시 전반적인 라디오 통신 기술은 많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독일은 전차 운용에 있어서 전차 간의 통신 기능 개발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독일 전차에는 통신장비가 장착되었고 무전수는 주요 승무원으로서 항상 탑승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포수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독일 Munster 전차 박물관에 전시된 Pz. III >
Guderian 장군의 이론에 따르면 전투에서는 일반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중형전차 한 대와 지원 임무를 수행할 보다 무거운 전차가 한 대 있어야 했습니다. Pz. IV는 중형전차 Pz. III보다 더 무거웠고 큰 차체를 가졌지만 짧은 포신의 75mm 주포를 장착했습니다. Pz. IV는 주로 고폭탄을 사용하며 지원 목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좌: Pz. IV Ausf. A 우: Pz. IV Ausf. H>
<독일 Munster 전차 박물관에 전시된 Pz. IV>
Guderian 장군은 또한 보병과 포병은 전차와 함께 전장 선두에서 전투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은 반궤도 방식의 전차와 자주포를 개발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보병, 포병, 전차가 함께 협력하여 전투에서 활약하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군과의 통신 시스템도 개발하여 언제든지 필요할 때 공군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전차를 주축으로 한 육군과 공군이 협동하여 전투를 이끌어간다는 개념은 그 당시로써는 상당히 진보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