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 특집] 국군의 역사

전차장 여러분!

10월 1일 오늘은 건군 70주년 국군의 날입니다.

뜻깊은 날, 워게이밍과 함께 더욱 뜻깊은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전차장님께 국군의 역사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국군의 날은 왜 10월 1일일까요?


육군
은 1946년 01월 15일 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된 날을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뿌리가 되는 해방병단(海防兵團)의 창설된 날을
공군 1949년 10월 01일 육군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날을 창설일로 정해 기념했습니다.

이후 육·해·공군의 단결과 국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남침한 북한 공산군을 한국군이 반격하여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 1일
국군의 날로 지정하고 기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

건군기 (1945년~1950년)

국군 역사의 시작은 1945년 8월 15일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복 후 위탁 통치를 하게 된 미군정 당국은 남한이 당시 처한 상황을 따져 보았을 때 미군 병력만으로는 안보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법령 제28호에 근거, 현 국방부의 모태가 된 최초의 우리나라 국방 조직 '국방사령부'를 발족하고 
1946년 1월 15일에는 '국방경비대'를 창설합니다.

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식 대한민국 '육군'이 됩니다.


국방사령부 발족 내용이 담긴 미군정법령 28호 등 국방사령부·국방경비대 관련 자료들    [출처] 전쟁기념관

 

한편,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인 1945년 11월 11일에는 초대 해군 참모인 손원일을 중심으로 '해방병단'이 창설되었습니다.

해방병단은 이후 국방사령부에 편입되면서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되었다가 육군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해군'으로 발족됩니다.


해군병력증모명령서, 초대 해군참모 손원일의 건국공로훈장    [출처] 전쟁기념관

 

공군육군에 속해 있던 '육군항공사령부'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항공사령부는 대통령령 제254호인 '공군본부 직제'에 따라 1949년 10월 1일에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대한민국 '공군'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이로써 국군은 육·해·공군의 3군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공군 창설 과정이 담긴 사진첩    [출처] 전쟁기념관

  

전후정비기 (1950년대)

이렇게 창설된 국군은 이후 6·25 전쟁 과정을 거친 후 1950년대에 이르러 전후정비기를 맞이합니다.

전후정비기의 국군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군 제도 정비, 군 장비 도입 등 국군 군사력 증대, 그리고 이를 위한 
대미(對美) 군사 원조를 촉진 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시기에 육군은 전방작전, 후방지원 및 교육훈련의 형태로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제1, 2군 사령부와 교육총본부를
설립
하였고, 해군은 1953년에 한국함대사령부를 창설하고 동해와 서해, 남해의 작전권을 인수합니다.

공군이 미F-86을 도입하여 한국 최초의 제트비행단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국방체제 정립기 (1960년대)

1960년대에 접어들며 국군은 군 장비의 현대화 추진, 병역법 개정, 군인사법 체계화 등 국방 체제 정립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육군의 M-16소총, M-48전차 도입과 호크·나이키 유도탄 부대 창설,해군이 직접 건조한 함정과 미국에서 도입한 구축함 등으로
창설한 1개 전단,공군의 F-4D팬텀 전폭기와 C-54D 수송기 도입 및 전투비행단과 전술 공수 비행 부대 창설 등 3군 모두
현대 장비를 전폭적으로 도입하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여 국군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된 시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미국과 월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월남전에 국군을 파병하여 우리나라의 많은 군인들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몸을 던져 싸웠습니다. 덕분에 우리 경제가 더욱 더 발전하고 국방력이 더욱 튼튼해 질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주민들을 지원하는 국군의 모습을 재연한 디오라마    [출처] 전쟁기념관

 

제도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향토 예비군의 창설입니다. 향토 예비군은 거주지 단위로 지역 예비군,
직장 단위로 직장 예비군으로 나누어 편성하여 평상시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유사시에 소집되어 지역을 지키는 형태로
운영하여 긴급 사태에 추가로 필요한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주국방 기반 조성기 (1970년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미국의 무상 원조가 끝나게 되자, 우리의 안보는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할 자주적 인식이 대두되면서 자주국방의 기반을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주한 미군과 함께 수행하던 휴전선 방어 임무를 우리 국군이 전담하게 되었고 우리 국군의 힘을 더욱 키워 자주국방을 조기에 달성하고자 전력 증강 계획 사업인 제1차 율곡사업(1974~1981)을 추진합니다.

10만 양병설의 주인인 율곡 이이 선생의 유비무환 정신을 본받고자 이이 선생의 호를 따서 명명한 이 사업을 통해, 국군은 무기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부대를 증설하는 등 더욱더 근대화된 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다양한 군 장비 개발에 착수합니다.
1970년 설립 때부터 1980년 말까지 이곳에서 약 155여 개의 장비 개발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특히 1978년에는 한국형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백곰'이 발사 시험에 성공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되었습니다!

 

자주국방 강화기 (1980년대)

1970년대엔 자주국방을 위해 기반을 조성했다면 1980년대에는 자주국방 실현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간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제1차 율곡사업에 이어 제2차 율곡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한국의 지형과 한국인 체형에 딱 맞는 K-1 전차나 
K-200 장갑차, K-2 소총 등 다양한 무기를 양산하여 전력을 더욱 증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계함과 유도탄고속함, K-2 소총, K-3 기관총, K-1 전차 등 1980년대 한국이 만든 무기와 모형들    [출처] 전쟁기념관

 

또한 우리나라의 발전에 따라 나날이 커지는 국방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방 활동의 종합 체계인 국방 기획 관리 제도를 정착시켰고 군 상부 지휘구조를 한국형 합동군제 형태로 개편하여 1990년 10월 1일에는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기존의 단일군 체제에서 벗어나 육해공 3군의 통합 전력을 극대화시켜 자주국방 태세가 더욱더 견고해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국방태세 발전기 (1990년대~ 현재)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국방태세 발전기에는, 1970년대부터 진행해오던 제 1, 2차 율곡사업을 1990년대에는 
방위력개선사업으로 연계시켜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주요 무기들을 우리나라에서 만들 수 있는 자생력을 기름과 동시에 
첨단 방위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서울 각지에 있던 각 군 본부가 안정적이고 새로운 전략거점인 계룡대로 함께 이전하면서 3군 통합 전력 발전의 기반을
조성하게 됩니다.

한편 1994년 12월 1일에는 UN군으로부터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를 받았는데요, 이로써 평상시에는 국군의 작전 권한이
전적으로 합참의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어 국군의 자주국방 태세 확립이 그 목표에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국군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계 평화 유지에 앞장서며 한국군의 위용을
널리 떨치고 있습니다.

현재 생산 배치되어 작전 운용 중에 있는 한국형 첨단 탄모 미사일 '현무'의 모습    [출처] 전쟁기념관

 

지금까지 국군 건군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국군의 날을 맞아 전차장 여러분들도 우리나라의 안녕과 수호를 위해 피땀 흘린 수많은 국군 장병들의 노력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본 컨텐츠는 전쟁 기념관 공식 블로그의 「전쟁기념관 이야기, 국군의 날에 알아보는 우리 국군의 역사」 컨텐츠를 참고하여 재작성된 글입니다. 모든 내용 및 사진들은 전쟁기념관의 협조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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