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의 역사 이야기 #7 80일간의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차장 여러분, 

전장에 흐르는 긴장감만큼 전쟁 중에는 흥미진진한 사건이 자주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가우디가 여러분께 생생한 역사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잘 알려진 사건부터 와전된 일화까지, 가우디가 소개하는 역사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가우디가 소개할 일곱 번째 이야기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80일간의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히틀러와 스탈린, 이 두 사람은 전쟁사에서 수많은 화젯거리를 양산한 인물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밀리터리 매니아의 이야기 소재 거리로도 오르내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둘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이 다루어진 전투는 단연 2백만 명의 전사자가 생긴 ‘80일간의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닐까 생각하여 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사진 1. 폴란드를 침공한 두 나라의 지휘관이 연출한 절친 모드

독일과 소련은 원래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독일군이 느닷없이 모스크바로 폭풍 진격하기 전까지는 원수지간이 아니었죠.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눠 먹을 만큼 외교적, 군사적으로 협력하던 사이였습니다.

절친 관계의 시작은 1922년 4월 체결된 ‘라팔로 조약(Treaty of Rapallo)’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독일과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에 환대받지 못하며 외교적으로 고립된 처지였습니다. ‘과부 심정 홀아비가 알아준다’는 말처럼 서로 돕자는 차원에서 맺은 것이 라팔로 조약이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이 1차 대전 승전국들의 눈을 피해 전차전을 훈련할 수 있도록 카잔(Kazan)지역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전차 제조기술을 받았습니다. 독일 공군 역시 소련의 리페츠크(Lipetsk) 지역에서 몰래 항공훈련을 할 수 있었고 항공기술을 제공했습니다. 라팔로 조약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이 두 국가가 교환한 첫 번째 커플링 반지였던 셈입니다.

사진 2.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의 T-34 조립 라인

산업화를 추진 중이던 소련은 넘겨받은 전차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명작 T-34 탱크를 개발했고 스탈린그라드의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위치한 트랙터 공장은 트랙터와 더불어 T-34 생산량의 50%를 담당하며 단박에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공장 중 하나로 발돋움하기 이르렀습니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에서 전투의 주 무대로 이 공장이 등장한 것도 아마 이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T-34 전차 탄생의 지대한 공헌을 한 셈입니다. 



사진 3. 1942년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서 생산한 T-34

이후, 독일과 소련이 나눈 두 번째 커플링 반지는 1939년 8월에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입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맺고 어떤 일이 벌어지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데 합의했습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소련과 독일은 동유럽에서 콩알 반쪽도 나눠 먹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죠. 양 국가의 행복이 무르익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둘의 아름다운 관계는 히틀러의 변심으로 깨지게 됩니다. 욕망이 들끓었기 때문이죠. 소련의 넓디넓은 땅덩어리와 자원을 보니 탐이 난 것입니다. 히틀러는 전쟁 시작 후 3개월 안에 소련의 항복을 받아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3백만의 병력, 3천 대가 넘는 탱크, 7천 대의 야포, 2천 대의 항공기를 앞세워 국경을 넘었고 파죽지세로 진격했습니다. 당황한 스탈린이 병력과 장비를 박박 긁어모으는 동안 독일군은 불과 두 달이 안 되어 남부 거점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도달합니다.

사진 4. 볼가 강 서안을 따라 있는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는 볼가 강을 따라 40km 넘게 길게 늘어선 산업도시로 남부 유전지대를 점령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거점입니다. 아울러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재정지원을 받아 설립한 현대식 공장들이 즐비했습니다. 독일군에게는 소련의 군수물자 생산능력에 타격을 주고 독일군 전차의 정비를 위해 꼭 수중에 넣어야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독일군이 선정한 첫 번째 선정지역은 도시 북쪽에 있는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이었습니다.

1942년 8월 23일 아침 6시, 독일군은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군의 전술은 지금의 미군 전술과 비슷했습니다. 먼저 항공폭격과 포격으로 쑥대밭을 만들고 전차를 앞세워 남은 전력을 괴멸, 나머지는 보병들이 뒤처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도시 자체가 거대한 공장단지였던 스탈린그라드에서 이 전술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부서지고 파괴된 잔해가 너무 거대해서 전차부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잔해 속에 매복한 적군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진 5.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독일군

이뿐만 아니라 독일군을 괴롭히는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대공포대였던 1077부대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주변을 방어하던 1077부대는 독일군에 격렬히 맞섰습니다. 독일군이 접근하자 각종 대공화기의 각도를 낮춰 이틀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저항에 독일군은 83대의 탱크, 15대의 수송 차량, 14대의 폭격기, 3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잃은 후에야 포대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피해보다 독일군을 놀라게 한 것은 전멸한 소련 병사들이었습니다. 소련군 병사들이 전원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1077부대는 여군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힘겹게 제압한 적군이 여군부대라는 걸 알고 놀라움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여군 전투부대를 운영하지 않던 독일군에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죠. 놀라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진 6. 독일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소련의 여군부대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앞 대로까지 진격하자 새로운 반격에 직면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T-34 전차들이 끊임없이 출현한 것입니다. 정찰부대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전차부대에 대해 통보받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 전차들의 등장은 미스터리였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출현한 것이었을까? 파괴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현하는 T-34 전차의 비밀은 머지않아 밝혀졌습니다.

도색과 기관총 장착이 미흡한 상태로 독일군 앞을 막아서던 전차들은 모두 공장에서 막 조립되어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공장의 작업자들은 공장 안까지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에서도 탱크조립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승무원이 되어 전차를 몰고 독일군을 향해 돌격한 것입니다. 공장 문만 나서면 전선인 매우 급한 상황에서 후방의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작업자들은 자신이 만든 전차를 몰고 직접 전투에 나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공장 작업자들은 조립할 부품을 모두 소진하자 소총을 들고 맞섰습니다.

사진 7. 연장대신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서는 공장 작업자들 

앞선 두 사건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일군에게 재앙이 될 것을 암시하는 상징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이어 소련의 붉은 군대(Red Army)가 투입되면서 전선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화력이 뒤처진 소련군은 적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해서 근접전을 벌였습니다. 공중폭격과 포격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수류탄과 개인화기로 시가전을 펼치는 소련군을 제압하려면 모든 건물의 잔해, 빌딩과 방들을 점령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이런 스타일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격속도는 너무 느렸고 병사들의 피로감은 급증했습니다. 

사진 8.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독일군이 도심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볼가 강 동쪽에는 소련군이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에는 강을 도강한 소련군이 무기 없이 바로 전선에 투입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명의 군인을 한데 묶어 총 한 자루를 주며 돌격시키는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 살짝 과장되긴 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 소련군이 무기와 탄약 부족에 시달린 건 사실입니다. 소련군 지휘관이 후퇴하는 아군 병사들을 향해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또한 사실입니다. "죽을지언정 후퇴는 없다." "볼가 강 뒤에는 어떤 땅도 없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소련군 장교들은 이렇게 외치며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아군에게 총탄세례를 퍼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소련군이 무모한 짓을 벌인 이유는 지휘부가 세운 전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일군 병력을 스탈린그라드 내부에 붙들어놓고 도시 전체를 포위하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계획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독일군과 시가전을 벌일 병사들이 계속 투입되어야만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후 드디어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100만 병력이 도착하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남북으로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폐허가 된 도시 한가운데 포위되었습니다.

사진 9. 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장면

11월이 되자 독일군 30만 병력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탈출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젊고 애국심 투철한 병력을 계속 투입해 이중 삼중으로 도시를 포위했고 포위망을 뚫으려는 외부지원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항공지원마저 부족해지자 그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투로 양측은 무려 2백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총 50만에 달하는 병력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했지만 패배했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군수 공장들을 안전한 동부 깊숙이 이동시켜 24시간 가동하기 시작했고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남은 병력을 모조리 독일 전선에 투입했습니다. 3개월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던 히틀러의 예측이나 소련 패망을 예상했던 서유럽 국가들의 추측은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사진 10.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의 T-34 조형물

이 모든 역사를 지켜본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앞에는 단순하지만, 의미 있는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T-34의 실물이 포신을 높이 들고 선 모습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격렬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탱크 공장 작업자들의 특별한 희생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상징물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글: 가우디 (외부 역사 전문 블로거)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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